"목숨을 건 연주"란 말은 조금 생소하게 들립니다. '목숨을 건다'는 말과 '연주'란 말은 좀처럼 어울리기 힘든 말들입니다. 하지만 한 피아니스트가 목숨을 걸고 연주해야 하는 상황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폴란드에 살던 유태인 피아니스트 슈필만(Władysław Szpilman)은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유태인 박해를 시작하자 곤경에 빠집니다. 나치 독일은 게토라는 격리 수용 구역을 만들어 유태인들을 격리하여 살게 한 후에, 유태인 집단강제수용소에 보내어 노동력을 착취하며 학살을 시작하였습니다. 1942년 여름, 슈필만은 게토에서 거주하던 가족과 함께 수용소로 보내지던 도중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슈필만의 얼굴을 알아본 폴란드 경찰관이 그를 몰래 빼돌려 가까스로 수용소 행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슈필만은 폐허가 된 게토로 도망쳐서 겨우 목숨만 연명하며 숨어 살게 되었습니다.
어느 겨울날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먹을 것을 찾아다니다가 주방에서 오이 피클 통조림을 발견한 슈필만은 허겁지겁 벽난로의 부지깽이와 부삽을 이용해서 통조림을 따다가 떨어뜨립니다. 굴러가는 통조림이 멈춘 곳은 독일군 군화 앞이었습니다. 독일군 장교와의 갑작스런 조우..... 이는 유태인인 슈필만에게는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차갑고 냉정한 어조로 이것저것 심문하는 독일군 장교 앞에서 놀람과 공포에 얼어붙은 슈필만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단지 이곳에서 무엇을 하냐는 질문에만 통조림을 따는 중이었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합니다. 독일군 장교는 다시 그에게 어디에 사느냐고 묻습니다만 슈필만은 묵묵부답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기 전에 도망쳐서 그 집 천장에 숨어사는 유태인이라고 자기 입으로 실토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뭐하는 사람이냐고 다시 묻는 독일군 장교 앞에서 슈필만은 자신은 피아니스트라고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겨우 답을 합니다. 이에 독일군 장교는 그를 옆방으로 데리고 가서 그 방에 놓여있던 피아노를 가르키며 그렇다면 한 곡 연주해 보라고 합니다.
유태인을 잡아서 수용소로 보내어 학살하는 잔악하고 냉혹한 나치 독일군의 장교 앞에서 그는 얼어서 곱은 손으로, 입에서 하얀 김이 나오는, 난방이 전혀 안 되는 추운 방에서 ‘목숨을 건 연주’를 시작합니다. 연습도 리허설도 없이 급작스럽게 마련된, 인생에서 마지막이 될 확률이 높은 독주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슈필만은 그가 가진 음악이란 언어를 통하여, 독일군 장교가 오래 잊고 있었던 따뜻한 피를 가진 한 인간을 그의 속 어딘가로부터 소환해 내어야만 살 길이 열린다고 믿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혼신의 힘을 다한 연주 끝에 독일군 장교는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슈필만에게 '여기에 숨어있는 것이냐'고 묻습니다. 슈필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독일군 장교는 다시 '유태인이냐'고 묻습니다. 그 질문에 슈필만은 공포에 사로잡힌 얼굴로 묵묵부답인 채 그를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슈필만과 함께 그의 은신처인 그 집의 천장을 둘러 본 독일군 장교는 돌아가며 곧 먹을 것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후로 그는 음식도 틈틈이 보내주고 여러 가지 도움을 주며 그를 돌보아줍니다. 심지어는 추위를 막으라고 자신이 입던 겨울 외투까지 보내줍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슈필만을 보살펴준 독일군 장교의 이름은 빌헬름 호젠펠트(Wilhelm Adalbert Hosenfeld)였습니다.
호젠펠트는 종전과 함께 소련군에게 사로잡혀서 포로가 되고맙니다. 독일군에게 용서가 없었던 소련은 호젠펠트를 전범재판에 넘겨서 25년간의 강제노역형에 처합니다. 1951년까지 호젠펠트의 이름도 모르고 있던 슈필만은 그의 사정을 알게 되어 많은 폴란드 사람들과 함께 그를 구해보려고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호젠펠트는 7년을 복역한 끝에 1952년 여러 가지 질환을 앓다가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슈필만이 게토에 피신해 살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독일군 장교 호젠펠트 앞에서 연주했던 곡은 “Chopin Nocturne C-sharp minor"였습니다. 이 곡은 1830년, 20세의 쇼팽이 고국 폴란드를 떠나 오스트리아 빈에 도착한 후 고국 폴란드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작곡한 곡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쇼팽 사후인 1895년에 유품들을 정리하다 발견되어 유작으로 출판되었다고 합니다.
1944년 초겨울, 잿빛 하늘이 낮게 드리운 바르샤바 게토의 폐허가 되다시피한 어느 집 안에서, 난방도 안 되는 추운 방에서 얼어서 곱은 손으로 한 유태인 피아니스트가 목숨을 걸고 연주했던 사연을 생각하며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폴란드계 캐나다인 피아니스트 얀 리시에츠키(Jan Lisiecki)가 연주합니다. Chopin Nocturne C-sharp min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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