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에서 연주되는 수많은 명곡들 중에서 합창곡들도 많습니다. 그들 중에서 가장 감명 깊고 유명한 것을 하나 꼽으라면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Nabucco)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꼽을 수 있습니다. 나부코(Nabucco)는 이태리어로 느부갓네살(2세)왕을 지칭하는 Nabucodonosor의 줄임말입니다. 나부코의 3막 2장에서 연주되는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금 의역을 하고 읽기 좋게 조금 재배열을 하였습니다.
황금빛 날개를 타고 날아가자
저 산비탈과 언덕까지
바람결에 부드럽고 감미로운
내 고향 땅의 향기가 날리는 그곳
요단강변에도 인사를 하고
무너진 시온성에도 찾아가야지
오, 지금은 갈 수 없는 사랑스런 내 조국
오, 소중하고 가슴 아픈 기억들이여!
선지자들의 금빛 하프여,
왜 묵묵히 버드나무 가지에 걸려있기만 하느냐?
지나간 날들의 이야기를 노래해다오!
우리 마음 속 깊이 자리한 그 아픈 기억들을 되살려다오.
예루살렘의 슬픈 운명을 기억하도록……
슬픈 비탄의 노래를 들려다오!
그리하여 하느님을 기억하여
그 도우심으로
이 아프고 힘든 나날들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아침이 주는 이미지는 대체로 희망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침은 고통스러운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저녁이 되고 밤이 와서, 꿈속으로 피하여 현실을 잊고만 싶은 사람들에게는 아침은 반갑지 않은 시간입니다. 바빌론에 포로가 되어 끌려가서 노예로서 고통스러운 하루 하루를 보내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특히 아침이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아침에 밝아오는 동녘 하늘가에서 쏜살같이 퍼져나가는 햇살을 볼 때면 바빌론의 히브리 노예들의 마음은 햇살을 따라서 서편으로 서편으로 그리운 고향 유대를 향해 날아가곤 했을 것입니다. 위의 노랫말을 쓴 솔레라(Temistocle Solera)는 이를 “황금빛 날개(햇살)를 타고 날아가보자…”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상념으로나마 그려보는 그리운 고향은 더이상 정겨운 곳이 아닙니다. 바빌론의 3차례에 걸친 침공으로 시온 산성은 무너지고 예루살렘과 여러 도시들은 처절하게 파괴되고 그리운 얼굴들은 모두 전란으로 생명을 잃거나 노예로 끌려와서 죽지 못해 사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고향땅은 이제는 돌아가 본들 반겨줄 그리운 사람 없는 황량한 땅일 뿐입니다. 평화롭게 고향에서 살던 옛기억들은 모두 가슴 아픈 추억일 뿐입니다.
하지만 위의 노랫말을 쓴 극작가(Temistocle Solera)는 히브리 노예들로 하여금 이런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붓게’ 합니다. 바빌론 강가의 버드나무 가지에 걸려있는, 더이상 노래하지 않는 “하프”에 주목하게합니다. 이 하프는 구약 성경 시편 137편에서 그 모티프를 따온 것 같습니다. 이방 땅에 끌려와 강제 노동에 시달리는 슬픔을 노래한 이 시편의 노래를 요약하여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바빌론의 강가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며 몹시 울었도다.
우리를 사로잡아다가
노예로 일을 시키는 자들이
재미 삼아서
우리로 하여금 시온의 노래 하나를 불러보라고 하지만
이방 땅에서 우리가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소냐.
도저히 “하프”를 탈 수 없고
도저히 아무 노래도 할 수 없어서
이를 버느나무 사이에 두었노라.
오페라의 노랫말에서는 선자자들의 금빛 하프에 빌어서, 지난날의 슬프고 가슴 아픈 예루살렘의 운명을 다시 기억하도록 노래해 달라고 하지만 이는 실은 가슴 속에 뼈 아프게 새겨져 있어서, 한시도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침공해 온 바빌론군에게 포위되어 맞선 수년간의 공성전 끝에 식량이 떨어져서 수많은 어린이들과 부녀자들, 노약자들이 굶어 죽고, 결국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의 살육을 당하고 하느님의 성전과 왕궁과 모든 집들이 불타버리고 예루살렘 성의 성벽은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예레미야52:13-14). 시드기야 왕은 경황 중에 몸을 빼서 여리고로 도망치다가 바빌론 군에게 사로잡혀서 자신의 아들들이 눈 앞에서 살해되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바빌론군은 시드기야 왕의 두 눈을 뽑아버리고 그를 바빌론으로 끌고갑니다. 조카(여호야긴왕)를 바빌론으로 잡아가고 자신을 왕좌에 올려 준 바빌론을 배신하고, 눈물의 선지자 예례미야의 거듭된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에 빌붙어서 바빌론에 대항해 보려다가 불러들인 파국적인 재앙이었습니다.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히브리 노예들은 예루살렘의 슬픈 과거, 슬픈 운명을 기억하며 그러한 가운데 바빌론 강가의 나무에 침묵하며 걸려 있는 선지자들의 금빛 하프를 주목합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들려준, 하느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이에 의지하며 버텨나갑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고향 유대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예레미야29:10)"는 약속의 말씀을 주신 바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비탄의 슬픈 기억을 주요 소재로 하고 있지만,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노래하는 곡입니다. 그런 면에서 고난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많은 위로와 살아나갈 희망을 주는 곡이기도 합니다.
이 오페라를 작곡할 당시 베르디는 실로 참담한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해마다 한 명씩 어린 딸과 아들을 줄지어 잃고 슬픔에 잠겨 있었는데, 급기야 첫사랑이었던 아내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결혼한 지 4년만에 3년간 해마다 가족을 한 사람씩 떠나보내며 홀로 된 베르디는 후에 이를 "무시무시한 운명이 연속으로 엄습해왔다"고 술회한 바 있습니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에서 작곡한 두 번째 오페라가 1840년 무대에 올려져서 참담한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심한 우울증을 앓게 된 베르디는 깊은 실의에 잠겨서, 삶의 모든 의욕을 잃고 두문불출하고 있었습니다.
베르디의 재능을 높게 평가해고 있던 스칼라 좌(극장)의 지배인 메렐리(Bartolomeo Merelli)는 실의에 잠긴 베르디를 돕기 위하여 베르디의 의욕을 불러일으킬 오페라 대본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성경에 나오는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2세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대본을 구하게 됩니다. 이 대본은 그의 생각대로 베르디를 매혹시킵니다. 베르디는 특히 비참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소망을 품고 희망을 노래하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의 가사를 보면서 히브리 노예들이 처했던 상황이 자신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며 애착을 가지고 작곡을 시작합니다.
1842년 3월에 밀라노의 스칼라좌에서 초연된 이 오페라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여러 개의 소국으로 나뉘어 실질적으로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절망과 실의, 패배감에 잠겼던 이탈리아 국민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히브리 노예들의 이야기가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의 애국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이 오페라에 더욱 열광하게 되었고 특히 3막2장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에 매료됩니다. 이 노래가 불리는 대목에서는 청중 모두가 열광적으로 앵콜을 외쳐서 하는 수 없이 이 노래는 공연할 때마다 2번씩 부를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차차 공연 중에 관중 모두가 이 노래가 연주될 때면 목소리를 합쳐서 이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이 전통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공전의 대성공을 거둔 이 오페라의 덕분에 베르디는 국민적인 영웅이 되고 베르디가 입던 스타일의 양복과 타이도 대유행을 했다고 합니다. 이 노래는 차차 국민들 사이에서 통일에 관한 소망을 대변하는 이탈리아의 제2의 국가처럼 불리게 됩니다. 1901년 베르디의 장례식에서도 이 노래가 800명으로 구성된 합창단에 의해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연주되었습니다.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중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가사를 음미하며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비참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히브리 노예들과, 삶의 모든 희망을 잃고 좌절하고 있던 베르디의 아픔과, 또 옛 영광은 전설처럼 스러지고 타국의 식민지나 다름 없는 상황에서 탄식하며 살아가던 이탈리아 사람들의 사연을 생각하며 들으면 이 곡은 더욱 더 큰 감동을 주는 곡입니다.
아래 영상은 베르디 서거 100주년이 되는 2001년 New York Metropolitan Opera House의 공연에서 연주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입니다. 실제 공연에서 이 곡은 전례를 따라 2번 연주되었지만 이 영상에서는 두 번째 연주는 편집하여 나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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