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음악

마태수난곡/BWV244-78 Wir setzen uns mit Tränen nieder

몬티셀로 2022. 10. 8. 09:03

서양 고전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뛰어난 작곡가를 한 명만 꼽으라면 전문가들은 대체로 바흐를 꼽습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도 서양음악사에서 바흐의 지위를 넘보지 못할 정도로 월등하게 뛰어난 바흐의 지위는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서 확립되었습니다.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멘델스존에 의한 바흐의 <마태수난곡>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후로 유럽에서는 바흐 붐이 본격적으로 일었고 묻혀있던 바흐의 곡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바흐 곡들이 잇달아 발굴되고  연주되기 시작되며 바흐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었습니다.

 

 <마태수난곡>은 마태복음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수난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곡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 끝에 오는 부활은 성탄과 함께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기독교에서는 이를 매년 각각 고난 주간과 부활절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묘사한 수난곡들은 대체로 교회의 예배와 행사에 음악이 사용된 것과 궤를 같이 하여 생성되어 사용되고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대략 12세기의 자료들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해설자 역할을 하는 테너 파트의 복음사(evangelist) , 베이스 파트의 그리스도 역,  알토 파트의 군중 역을 세 사람이 나누어 담당하여 오페라를 연주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수난을 묘사하는 수난곡들이 만들어져 고난주간의 예배에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형식은 후에 만들어진 수난곡들에서도 지속적으로 유지되다가,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들어서면서 규모가 더 커지고 다성부의 합창곡들이 함께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당시에 작곡된 가장 유명한 수난곡들로 하인리히 쉬츠(Heinrich Schütz)가 각각 누가복음, 마태복음 그리고 요한 복음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초로 작곡한  <누가수난곡>, <마태수난곡>, <요한수난곡> 등이 있습니다. 하인리히 쉬츠(1585-1672)는 바흐보다 100년 앞서 태어나서 바로크 음악의 기초를 닦은 바흐 이전의 가장 중요한 음악가입니다. 독일 교회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들은 바흐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바흐가 수난곡들을  작곡할 때, 쉬츠가 만년에 작곡한 수난곡들을 참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은 바흐가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에서 근무할 때 작곡되었습니다. 모두 78곡으로 이루어진 대작으로 연주시간이 무려 3시간 반에 이릅니다.  마태 복음 26장과 27, 그리고 시인 피칸더(본명Christian Friedrich Henrici)의 종교시 등이 텍스트로 사용되었습니다.  1729 4 15일에 초연된 것으로 보이는데, 1727년의 성 금요일인 4 11일에 초연되었다는 설도 있어서 초연 날자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있습니다. 그 후 몇 차례 더 연주되었고 바흐 자신이 조금 개작을 하기도 했습니다. <마태수난곡>의 초연은, 그날 다른 곳에서 수난곡 공연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가버려서, 공연장이던 성 토마스 교회의 좌석이 다 차지도 않은 비교적 초라한 공연이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공연 후에 라이프치히의 유지들은 바흐의 <마태수난곡>에 대해 신성모독적인 곡이라며 분개하여 바흐를 비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바흐 사후에 <마태수난곡>은 악보로만 남아서 펠릭스 멘델스존이 이를 발굴하여 무대에 올려서 부활시킬 때까지 거의 100년간 사장되어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독일의 부유한 유태인 은행가의 집안에서 어느 것 하나 남 부러울 것이 없는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 펠릭스(Felix)는 라틴어로 행운, 또는 행복이란 뜻입니다. 그의 부모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천재적 재능을 보니던 멘델스존을 음악가로 키우기 위하여 막대한 재력과 인맥을 총동원하여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멘델스존은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베를린 음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멘델스존의 스승이며 그 당시에 베를린 음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가였던 베를린대학 음악교수 칼 프리드리히 첼터(Karl Friedrich Zelter)는 바흐의 열렬한 신봉자이기도 해서 멘델스존은 그의 영향으로 바흐의 음악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멘델스존은 바흐의 <마태수난곡>에 매료되어 이를 무대에 올리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첼터는 이에 대해서 무척 회의적이었습니다.  <마태수난곡>100년 전의 철 지난 음악이기도 했고, 3시간 반이 넘는 긴 공연시간으로 인해서 관객들에게 호평을 끌어내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멘델스존의 결심은 확고했습니다.  그는 스승 첼터를 지속적으로 설득하였습니다. 첼터는 당시 독일 최고의 합창단을 보유한 베를린 징아카데미(Berliner Singakademie)를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공연의 성공을 위해서는 최고의 합창단과 최고의 가수들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멘델스존의 가문이 베를린 문화 예술계 미치던 영향력이 무척 컸던 관계로 첼터도 멘델스존의 의사를 끝까지 무시할 수 없어서 결국은 멘델스존을 지원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유태인인 멘델스존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묘사하는 <마태수난곡>을 제대로 해석하여 공연할 수 있겠느냐는 악의에 찬 비판의 시각도 있었습니다.

 

첼터의 지원하에 최고의 합창단과 최고의 가수들과 함께 준비된 공연은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라이프찌히의 토마스 교회에서 초라하게 초연된 후 100년이 지난 1829 3 11, 약관 20살의 멘델스존의 지휘로 다시 무대에 올려지게 되었습니다. 국왕과 모든 대신들이 참석한 연주회는 온 유럽을 떠들썩하게 할 정도로 대성공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재공연 요청이 잇달아서 10일 후인 3 21일에 재공연이 있었습니다. 이날은 바흐가 탄생하고 꼭 144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베를린의 모든 지식인들이 몰려와 공연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열린 재공연도, 일각에서 유럽 문화계의 지진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성공적이었습니다. 이 공연이 계기가 되어 유럽 문화계에서는 바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그의 음악을 발굴하여 공연하고 연구하는 붐이 일었습니다. 이를 바흐 르네상스라고 합니다. 바흐가 오늘날 음악의 아버지라고 추앙받게 된 데는 전적으로 멘델스존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흐가 근무했던 독일의 라이프찌히의 성토마스 교회의 창문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에는 바흐의 초상이 새겨져 있고 그 옆에는 바흐를 재발견하여 널리 알린 것을 기리기 위해서 멘델스존의 초상을 새겨두었습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 중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곡 BWV244-78 Wir setzen uns mit Tränen nieder(눈물을 쏟으며 앉아 비오니)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용은 비탄이 가득한 곡이지만 따스한 위로가 느껴지며 감미롭기까지 합니다. 바흐가 그의 음악에서 슬픔을 다루는 방식은 슬픔에 몰입되게 하지 않고 비교적 관조적이며 듣는 이들로 하여금 위로를 느낄 수 있게 합니다. 비엔나 음악동우회의 합창단 Wiener Singverein의 연주로 들으시겠습니다. [BWV244-78 Wiener Singverein]. 

 

 

눈물을 쏟으며 주의 무덤 앞에 앉아

주께 비옵나니

평안히 쉬소서,

부디 평안히 쉬소서! 

 

이제 쉬소서,

당신의 지치고 고된 뼈들이여

이제 쉬소서! 

주의 돌베개 

이제 당신의 지친 영혼 위한

안락한 베개 되리니

주의 돌무덤

당신의 영혼 고이 쉴 안식처 되리니

 

주여, 쉬소서

주여, 쉬소서 

안온히 쉼을 얻어

당신의 두 눈 평안히 감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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